로코코 양식의 유래
로코코(Rococo)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이다. 어원은 프랑스어 [rocaille = 조개 장식]에서 유래되었다.
18세기 초는 스펙트럼 추구의 시기였다.
17세기 후반에 바로크 양식의 쇠퇴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절대 군주제의 종말이 다가왔다. 루이 14세는 파리의 모든 왕궁행정을 베르사유로 이적했고 이에 따라 수많은 귀족과 병사들이 베르사유 근처로 이주했다. 궁전에 모여 살았던 귀족들은 불만이 늘어났고, 루이 14세가 죽은 후 궁전을 탈출하고 넓고 자유로운 공간에 집을 지었다. 이에 따라 사회적 변화가 크게 일었다.
바로크 양식의 산물인 베르사유 궁전과 같은 권력을 상징하는 웅장한 건축물은 루이 14세의 태양왕과도 같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했었지만 루이 15세는 권력과 화려한 상징들을 이해하지 못하여, 온화하고 우아한 장식들로 변화했다. 이제 가벼움, 우아함 그리고 기발함을 강조하는 새로운 미학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로코코 양식은 타조깃털과 같은 가벼움을 나타내며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장식물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루이15세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의 문화가 활발해졌는데 로코코 특유의 가벼운 화려함은 이를 잘 나타낸다. 로코코 양식은 미술뿐 아니라 건축까지 영향을 끼쳤다. 왕실을 위한 게 아닌 귀족을 위한 여흥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화가들은 귀족 특유의 취향과 관능미가 혼재된 그림을 그렸고, 여흥 뒤의 우울함과 공허함을 내비치는 작품이 많다.
백과전서의 등장
백과전서의 시작은 서적상인 앙드레 르 브르통은 18세기 철학자 드니 디드로에게 체임버스 백과사전(Cyclopaedia, or Universal Dictionary of Arts and Sciences)을 불어본으로 번역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후에 번역의 취지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체임버스 백과사전을 다시 번역하는 것이 그치지 말고, 세상의 모든 새로운 지식을 창간하기로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루이 15세의 공식 수석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이 백과전서파를 후원하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의 뛰어난 안목과 취향은 당시의 예술 및 문화적 풍경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 내의 살롱에서 볼테르를 비롯한 철학자와 예술과 그룹을 후원했다. 이러한 노력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백과전서]를 간행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보수파와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보호하고 홍보했으며, 과학, 철학, 인권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이 작품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백과전서와의 그녀의 참여는 지적 진보에 대한 그녀의 헌신과 교육과 이성의 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강조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험난한 궁정 생활을 헤쳐 나가는 능력과 프랑스 예술, 건축, 사상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남긴 능력이 특징이며, 그녀는 로코코 시대의 역사와 18세기의 더 광범위한 문화적 발전에서 중심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종교적인 입장은 달랐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예수회 성직자들은 백과전서파의 성장이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을 위태롭게 한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백과전서가 완성될 때 쯤 예약자가 4,300명으로 늘어나자 성직자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백과전서의 인문주의적이고 개혁적인 성향 때문에 기존 종교세력들의 반대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지배 계층도 백과사전파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는데, 백과전서는 종교적 관용, 사상의 자유, 과학과 기술의 가치 등에 대해 논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 민중이라며 백과사전파가 강력히 주장한 내용은 당시 프랑스의 지배세력을 못마땅하게 했다. 결국 1752년 2월 왕정은 백과전서를 금서로 지정했다. 덕분에 백과전서는 공개적으로 출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고 비밀리에 출판되는 수밖에 없었다.
로코코의 거장
이 시대의 거장은 "앙트완느 바토"로 벨기에 출신이지만 파리에 정착해 살다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이 시대의 화려한 궁정 축제와 유흥에 어울리는 인테리어 장식을 디자인해야 했다. 로코코 스타일은 프랑스에서 출발했지만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그의 예술은 개인적 표현과 인간 감정의 탐구로의 전환을 반영하며, 초기 시대의 지배적인 종교적, 역사적 주제에서 벗어났다. 바토의 작품은 종종 현실과 환상을 혼합하여 시청자를 우아함과 세련미의 세계로 초대하는 꿈같은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의 인물들 사이의 미묘한 상호 작용은 유혹에서 내성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감정 상태를 드러낸다.
로코코 양식에 있어서 페트갈랑트(=아연화 : 희극, 궁정생활, 병사 생활이나 공원을 배경으로 해서 우아한 복장으로 흥겹게 노니는 청년 남녀의 예술적 묘사. 18세기) 를 그린 최초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와토는 그늘진 공원과 환희에 찬 풍경을 배경으로 자그마한 인물을 자주 그렸는데, 그의 가볍게 반짝이는 붓질로 인해 인물들은 더욱 우아해 보였다.
주요 작품으로 《파리스의 심판》, 《키테라 섬으로의 출항》, 《이탈리아의 희극 연기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