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의 시작!
인상주의는 19세기 중후반 프랑스의 화가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당시 프랑스인들이 생각한 인상파 화가들은 이단적인 존재였다.
늘 그렇듯 큰 변화를 이끈 혁신은 초반에 큰 저항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초반엔 비주류로서 갖은 조롱과 멸시를 당했지만, 후반기에는 그 자체의 새로운 화풍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매끄러운 마감의 완성도를 중요시했던 기존의 화풍에서 -> 빛과 공기의 영향을 받아 시시각각 변화하는 찰나의 모습을 담아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사물 자체의 고유색과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빛에 따라 자신의 시각에 보이는 그대로 그림에 충실히 담아냈다. 말 그대로 찰나에 받은 '인상'을 표현한 것이다. 기존의 그림이 객관적으로 사실에 입각했다면 인상주의는 주관적이고 보다 감각적이다. 또한 찰나를 표현하기 위해 '색채분할법'을 사용한 점이 특징인데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어 원하는 색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섞지 않고 각각의 색들을 캔버스 위에 나열 또는 중첩해서 멀리 떨어져 보면 색이 서로 섞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망막 혼합 기법이다.
인상주의가 태동할 당시 프랑스 미술의 주류는 미술 아카데미가 이끌었다. 기존의 주류 화가들과 인상파 화가들은 대립구도에 있었는데 그 당시의 주류화가들은 인상파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인상주의 작품은 매끄럽게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 작품에 가까웠다. 하지만 1873년 세계 공황의 여파는 인상파의 존재를 알리는 시발점이 되어 미술사를 변화시켰다. 공황으로 경제 위기에 처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기존의 보수적인 아카데미인 살롱과 별도로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기 위해서 전람회인 인상주의 단체전을 개최했다.
제 1회 인상주의 전시회는 1874년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드가, 세잔, 르누아르, 모리조, 기요맹 등은 파리의 카퓌신 거리에서 개최되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첫 단체전은 보수적인 미술계에서 조롱당했다. 특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 작품은 풍자신문과 기사에서 인상파라고 비웃고 악평을 쏟았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상파의 전시회는 12년간 8회까지 계속되면서 전시회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인상파의 신선함에 투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인상주의 대표 화가
클로드 모네_[루앙 대성당] 연작
빛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돋보이는 이 연작은 동일한 풍경을 집요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모네는 시간과 날씨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성당의 모습을 캔버스 위에 담아냈다. 모네의 수련 연작과 마찬가지로 대성당 에서도 모네는 같은 공간을 시간대별로 끊임없이 관찰하며매 작품마다 새로운 점을 발견하여 표현해내고 있다.
이런 연작을 추구하게 된 데이는 모네의 깊은 고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물의 색이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인가? 빛에 유무나 공기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색감은 사물 그 자체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모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의 흐름을 표현해내는데 훌륭하게 성공했다.
C. 피사로_[밤의 몽마르트 대로]_1897
파리의 야경으로 모던 사회의 새로운 모습으로 밤의 거리를 환상적으로 표현했다.
인상파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듯한 그의 그림은 섬세한 터치로 색채가 쌓이며 화음을 자아낸다. 피사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을 관찰하여색이 한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음을 표현했다. 자기만의 낭만적인 세계에 대한 풍부한 감정을 여지없이 표현해낼 줄 아는 화가이다.
인상주의의 의의는 단순히 미술에서 그치지 않는다. 1848년 혁명 이후 노동자와 농민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면서 미술계와 문화계 전반에 그 영향이 물결치듯 퍼져나갔다. 미술의 변화는 곧 문화의 변화이다. 작은 변화의 시작은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수만 사람만 누리던 특권을 다수의 권리로 쟁취한 용기있는 변화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